퇴근 후의 자동 반사, 기계에 기대는 습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것이 있다. 바로 스마트폰과 TV 리모컨이다. 업무로 지친 몸과 마음을 풀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는 너무 쉽게 전자기기를 선택한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영상들, 무한 스크롤이 가능한 SNS, 소파에 앉아 넋을 놓고 바라보는 TV 화면. 그동안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퇴근과 동시에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켜고, 알림을 확인하고, 이어폰을 꽂고 다른 세상에 접속했다. 그렇게 하루의 마지막 시간은 늘 화면 속에 잠식당했다.
이런 패턴은 처음에는 일종의 보상처럼 느껴졌지만, 점점 공허함을 남기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나 흘렀는지도 모르게 콘텐츠를 소비하고 나면 마음은 오히려 더 피곤했고, 휴식을 취한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건 진짜 쉼이 아니라 그냥 ‘멍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저녁 시간을 이렇게 흘려보내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원해서 쉬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습관에 휩쓸린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전자기기를 모두 멀리한 저녁 루틴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퇴근하자마자 스마트폰은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고, TV는 전원을 끄고, 노트북은 아예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처음엔 뭔가 중요한 알림을 놓칠 것 같아 불안했고,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를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의외로 집 안은 고요하고 따뜻했다. 마치 오래 잊고 있었던 평온함이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전자기기 없이도 저녁은 흘러갔고, 그 안에 내가 주도하는 시간이 존재했다.
그 첫 날은 거창하지 않았다. 간단한 요리를 하고, 식탁에 앉아 조용히 식사하고, 책을 한 챕터 읽고, 따뜻한 물에 손발을 담그며 하루를 정리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 시간 동안 여러 영상들을 넘기고, 여러 번 알림 창을 확인하며 눈과 손을 바쁘게 움직였겠지만, 그날은 모든 감각이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전자기기 없이 보내는 저녁은 오히려 더 풍요롭고 충만했다. 정신없이 소비하는 콘텐츠보다 내 삶에 밀착된 일상의 순간들이 오히려 더 깊고 명료한 만족을 주었다.
그 변화는 단지 기계를 멀리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불필요한 정보로부터 멀어지니 내 생각에 집중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하루를 돌아보는 여유도 생겼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시간이 ‘내가 선택한 시간’이라는 점이다. 어떤 영상도, 어떤 자극도 나를 대신해주지 못하는 진짜 쉼을 맛본 것이다. 처음 시도해 본 전자기기 없는 저녁은, 단지 '기계 없이'가 아니라 '나답게' 살기 위한 작은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이 내 일상 전체의 리듬을 바꾸는 시작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전자기기 없는 저녁, 몰입과 감각의 회복
전자기기를 멀리한 저녁 시간은 나의 감각을 하나둘씩 되살려 주었다. 평소엔 식사도 영상을 보며 했기에 음식의 온도, 질감, 향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한 입 한 입 음미하며 먹는 습관이 생겼고, 식사 시간이 더 깊은 휴식의 시간이 되었다. 창문을 열면 들려오는 바람 소리, 주방에서 끓는 찌개의 소리, 고양이의 작은 움직임까지 이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소리들이 저녁을 더 풍부하게 채워주었다.
무엇보다 독서와 글쓰기가 저녁 루틴의 중심이 되었다. 스크린 대신 종이책을 펼치니 눈의 피로가 확연히 줄었고, 책 속 문장에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전자기기를 사용할 땐 늘 두세 가지를 동시에 하며 생각이 분산됐지만, 전자기기가 없는 환경에선 오직 한 가지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몰입은 하루 종일 흐트러졌던 집중력과 정서적인 안정감을 회복시켜 주었다.
또한, 이 시간을 활용해 요가나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게 되면서 몸의 피로도 줄어들었고, 수면의 질도 점차 개선되었다. 자기 전 스마트폰을 보는 대신, 따뜻한 차를 마시고 하루의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마치 오래된 일기를 다시 쓰는 기분이었다. 하루를 복기하고, 자신에게 말을 걸며 정리하는 과정은 나의 내면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내 저녁은 단순히 쉬는 시간이 아닌, 나를 회복시키는 시간으로 바뀌어갔다.
지속 가능한 전자기기 없는 삶을 위한 조건
전자기기 없이 저녁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외부 연락이 필요하거나, 갑작스럽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처음 며칠은 그런 예외 상황이 전자기기 없는 루틴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완벽한 배제보다는 유연한 운영이었다. 예를 들어, 저녁 9시 이후는 전자기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정해놓고, 그 이전 시간에 필요한 연락이나 확인을 모두 마치는 방식이었다.
또한, 전자기기 없는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에 대한 계획이 중요했다. 처음에는 막연히 스마트폰을 치우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자리에 어떤 활동을 채워야 할지가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나는 개인의 취향과 성향에 맞춘 루틴을 짜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독서가, 다른 이에겐 악기 연주나 그림 그리기, 혹은 산책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 시간이 '소비'가 아니라 '창조'의 시간, 또는 '회복'의 시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전자기기 없는 저녁 루틴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환경도 바꿨다. 스마트폰 충전기를 침실 밖에 두거나, 무드등과 향초, 아날로그시계를 침실에 두어 기술 대신 감각을 자극할 수 있는 요소를 배치했다. 그 결과 잠드는 시간이 일정해졌고, 아침에 느끼는 피로도도 현저히 줄었다. 무엇보다 하루를 내 손으로 마무리한다는 주도감은 나에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디지털에서 멀어진 삶은 불편함이 아닌, 오히려 인간적이고 따뜻한 리듬을 회복하는 과정임을 이 루틴을 통해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전자기기 없는 저녁 루틴은 단순한 생활 실험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나답게 되찾는 연습이자, 소외된 감각과 마음을 다시 불러들이는 회복의 시간이기도 하다. 하루 중 단 몇 시간이라도 기계의 소리 대신 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 간단한 변화가 나의 삶 전체에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는 상상 이상이었다.
